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까?

둘째 녀석이 보던 유럽역사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까?  18세기 프랑스는 영국보다 인구도 많았고, 국력도 영국에 뒤지지 않았으며, 기술 인력도 있었고,  도로, 교량, 운하 등 사회간접자본에도 영국 보다 더 많이 투자했는데, 왜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시작되었을까?   

그 이유는:

  • 영국은 국내 관세의 폐지를 1707년 스코틀랜드와 병합 이후 일찌감치 시행하였으나, 프랑스에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 때까지 국내 지역간 관세장벽이 상품교역의 원활한 유통을 가로막았다.
  • 프랑스 대혁명은 가능한 안정된 농촌사회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으로의 이행을 막고 소농위주의 농업방식을 확정하였다.    소농 경영방식의 프랑스 농업은 시장생산 보다는 자급자족의 필요에 생산량을 맞추어 기술개발, 종자개량, 경지확대 등 농업 효율화 노력에 있어서 영국에 비해 뒤떨어지게 되었다.
  •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농촌에서 밀려나와 도시로 이주한 노동계층은 극심한 빈곤상태로 빠져들었지만 영국은 ‘자유방임 경제학’을 신봉하며 정부 주도의 어떤 개혁과 규제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정부가 노동계층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 적극적 개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되었다.
  • 프랑스는 제조분야에서 대중의 소비용품 보다는 사치품 생산에 주력하였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시작된 것은 결국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믿음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영국이 자유방임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켰는지는 1846년-1847년 감자뿌리마름병으로 아일랜드인들이 1백만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1백만명이 해외로 탈출했을 때에도 그저 손을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를 시작한 후 100여년이 지난 뒤에 영국은 산업화로 인한 경제적 번영으로 노동자계급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중산층의 폭이 넓어져서 유럽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산업화가 경제적 번영과 계급갈등의 축소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유방임을 주장하던 고전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산업화의 성공사례는 결국 산업화가 늦어졌던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산업사회의 문제를 혁명이 아닌 개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유럽 여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Source: 이야기 세계사 2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까?”에 대한 4개의 응답

  1. 총 균 쇠라는 책에서도 이와같은 내용을 다루는것 같더군요

  2. 아마 책에 나왔던 내용이겠지만, “그래서 자유방임을 주장하던 고전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은 좀 위험한 주장인 것 같네요. 자유 방임만 고집하면, 소수는 계속 부자가 되지만, 사회 다수는 가난하게 되어, 사회의 소비 능력이 사라지므로 결국 아무리 물건을 찍어내도 팔리지 않는 현상이 빌생하는 것 같습니다.

    • 그 당시엔 그들의 주장이 ‘겉으론’ 맞는 것처럼 보였으니 맞는 말 같습니다. 전 오히려 “노동자계급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중산층의 폭이 넓어져서 유럽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말이 이상합니다.
      노동자란 계급이 생겨난 시점(아마도 지배계급이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 노동자계급이 윤택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부 좋은 직장을 가진 일부 노동자들은 윤택해졌지만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약자 아니었나요?
      물론 이 글은 교수님의 의견이 아닌 책의 내용이죠.^^

  3. 몇가지 지적을 드리고 싶군요,

    1. 영국의 안정적인 농촌이란 이미 튜더왕조 말기 부터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각 영주들이 영지를 사유화하고 농작물 대신 양을 방목하기 시작한 인클로저 운동시기에 농민들이 농지에서 내쫒기면서 안정적인 농촌의 틀은 붕괴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영주의 “가족적 책임”이라는 형태로 영민과 영주를 묶어두는 구조를 띄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국가의 농업구조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군요. 덧붙혀 19세기말, 20세기 초엽에 영국의 공업생산력을 추월했던 독일의 경우, 연방제국가라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노동계층과는 별도로, 영민으로서의 농민이라는 두체제 모두 1차세계대전 종전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2, 영국정부가 빈민구호를 방치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방향성을 아에 잘못잡은 것이 빈민 문제를 심화시킨 것이죠. 영국 정부는 빈민들을 수용해 의식주를 제공하는 구빈원, 그리고 구빈을 위한 최저생계비 지원 법안인 스피넘랜드법을 마련했지만, 이것들은 사실상 농민과 노동자들의 노동의욕자체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유럽대륙의 구빈제도는 사실상 이런 영국의 실패로 인해 사회내 불만세력의 증가를 막기위해 조직되어 도입된것들이죠.

    3. 결과적으로 산업화가 노동계층의 삶을 풍요롭게 한것은 맞습니다만, 계층들 사이에 메울수없는 골을 만들었습니다. 19세기 중반이후를 기준으로 노동계층은 중산-자본가계층에 비해 낮은 교육수준, 낮은 영양수준을 지녔고, 그로인한 결과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영국이 보어전쟁 당시 징병했던 병사들중 극빈노동자계층의 자원자들에는 신체자격미달로 탈락되는 이들이 속출했을 지경이니까요. 결국 이것은 자유당의 노력과 노동계층의 정치화로 어느정도 해소되긴 했지만, 20세기 초 유럽국가들간의 대전쟁에서 영국군 병사들이 다른 유럽국가들 병사들의 신체조건, 특히 신장에서 눈에 띄게 뒤떨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노출시키죠.
    게다가 귀족-자본가 계층 출신인 장교들과 노동계층출신의 일반 병사들사이에는 깊은 불신감이 존재해, 작전수행능력을 크게 저하시켜 1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당나귀가 지휘하는 사자들”이라는 촌평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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